세월이 빚은 된장처럼, 삶도 천천히 익어간다
KBS1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은 오랜 시간 시청자들의 아침을 따뜻하게 열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그 안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2024년 5월 20일 방영된 에피소드 “장독대 앞 세 모녀” 편은 전통 장맛을 지키며 살아가는 세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장독대가 가득한 마당. 그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세 사람은 어머니 광자 씨와 두 딸, 김순애, 김영애입니다. 이들의 하루는 메주를 옮기고, 된장을 가르고, 청국장을 띄우는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골살이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된 일상 속에는 세월과 마음이 삭아 만들어낸 '장맛 같은 삶'이 녹아 있습니다.
인생의 전환점: 상실과 귀향
이 이야기의 시작은 둘째딸 김영애 씨의 귀향입니다. 평범한 전업주부였던 그녀는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삶의 방향을 잃습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문득 어머니의 장맛이 떠올랐고, 그것이 삶의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간 시골집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광자 씨는 장을 담그는 일이 단순히 손맛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기에 걱정을 거듭했지요. 장은 시간과 인내가 쌓여야 나오는 결과물. 한순간의 열정만으로는 넘볼 수 없는 삶의 지혜였습니다.
하지만 영애 씨의 귀향은 단순한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실’을 통해 가족이라는 뿌리로 되돌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변화의 물결은 언니 김순애 씨에게도 전해졌고, 그녀 역시 주저 없이 시골로 내려와 함께 어머니의 장맛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말 없는 협업, 소리 없는 사랑
세 모녀는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된장의 깊이만큼이나, 이들의 마음에도 서로를 향한 신뢰와 애틋함이 녹아 있지요. 그러나 그 과정이 항상 평화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청국장을 띄우고, 밭을 매며, 고추장을 만들고, 장을 가르는 하루하루는 반복과 싸움의 연속입니다. 때로는 대화 중에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말없이 등을 돌리기도 하지만, 그 모든 순간 뒤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든든히 버티고 있습니다.
언니 순애 씨는 “엄마의 된장은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 안에는 존경과 애틋함,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그 깊이를 닮고 싶다는 열망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길, 기억으로 남다
이제 어머니 광자 씨의 기운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장독대 앞의 삶도, 이제는 딸들이 조금씩 대신 이어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딸들은 어머니의 손끝을 눈에 담고, 어머니의 숨결을 기억하려 애씁니다.
장독을 닦고, 간장을 가르고, 메주를 옮기는 그 순간마다, 광자 씨가 걸어온 세월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세 모녀가 함께 엉켜 장을 담글 때마다, 그 속에 시간이 쌓이고, 기억이 스며들고, 사랑이 익어갑니다.
이제 김영애 씨는 말합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남편과 함께 살던 안정적인 삶에서, 그녀는 세상의 더 큰 의미를 몰랐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지금은 압니다. 가족이 함께하는 이 시골 마당이야말로 진짜 우주라는 것을요.
장독대가 전하는 인생의 메시지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장을 담그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전환점에서 다시 만난 가족의 이야기이며, 상실을 딛고 다시 피어난 관계의 회복입니다. 장독대는 어머니의 인생, 딸들의 귀향, 그리고 세 사람의 애틋한 사랑을 상징하는 무언의 존재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묻게 됩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수고이며, 동시에 얼마나 깊은 축복인지 말이죠.
장맛은 저절로 나지 않습니다. 매일의 수고와 반복, 갈등과 화해 속에서 조금씩 깊어지는 맛입니다. 그리고 가족도 그렇습니다. 때론 서먹하고, 때론 상처를 주지만, 결국에는 서로의 곁에서 다시 웃게 해주는 존재. 그런 존재가 바로 가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