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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럽병사의 비밀 -故 이태석 신부 이야기, 울지마 톤즈

by 똑똑똑32 2025.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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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럽병사의 비밀’을 통해 다시 조명된 故 이태석 신부의 삶은 단순한 감동 이상의 울림을 남깁니다. 한 사람의 선택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새겨집니다.

의사, 신부, 선교사, 교육자, 음악가… 그는 단 하나의 직업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위대함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오늘날, 이태석 신부의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 부산대 의대를 나와 군의관까지… 잘나가던 의사가 왜 신부가 되었나?

이태석 신부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한 수재였습니다. 안락한 삶과 성공이 보장된 길 위에 있었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전공의 시험날조차 성당에 있었던 그는, 수도회 입회를 결심합니다. 이후 10년이 넘는 수련 과정을 거쳐 사제로 서품됩니다. 늦은 나이에 의사를 포기하고 신부가 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는 묵묵히 그 길을 걸었습니다.

 

 

 

 

 

2. 남수단 톤즈, 가장 위험한 곳을 택한 이유

전 세계 수많은 선교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가난한 지역으로 꼽히는 남수단 톤즈. 내전, 기아, 질병, 의료 인프라 전무… 어느 누구도 선뜻 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는 “누군가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함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톤즈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일한 의사, 신부, 교사로 살아갑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톤즈는 병원은 물론 의료기기 하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청진기 하나로 환자들을 돌봤고, 한센병 환자 마을까지 직접 찾아가 발을 본뜬 신발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눈물이 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병원도, 학교도 직접 지은 신부님

이태석 신부는 말뿐인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행동하는 사제였습니다. 그는 나일강 강가에서 직접 모래를 날라 벽돌을 만들고 시멘트를 개어 병원을 지었습니다. ‘지어주다’가 아니라 ‘직접 지었다’는 점에서 그의 헌신이 더욱 특별합니다.

그가 만든 병원은 현지 주민들에게는 생명의 공간이었고, 그가 복구한 학교는 미래를 여는 희망의 공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음악 교육도 함께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함께 연주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습니다. 생존조차 어려운 그곳에서 음악을 가르쳤다는 점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그의 신념을 보여줍니다.

 

 

4. 대장암 판정, 그리고 마지막 유언

2008년, 이태석 신부는 일시 귀국 중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습니다. 그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톤즈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16번의 항암치료를 버텨내며 그는 끝까지 희망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꿈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2010년 1월 14일, 향년 47세로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렇게 짧고 강했습니다.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죽음 앞에서조차 원망도 미련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 그의 태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5. 우리는 왜 이태석 신부를 잊지 못하는가?

1) 진심이 만든 감동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단순한 자원봉사가 아닌 ‘삶 전체를 던진 헌신’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진심으로 기억합니다.

2) 공감과 인간 존중

병들고 버려진 환자에게 손을 내밀었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미래를 열어주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복지나 시혜가 아니라, 철저한 인간 존중의 실천이었습니다.

3) 신앙과 인본주의의 결합

이태석 신부는 신부였지만, 의사이자 교사이자 음악가였습니다. 신앙을 통해 인간을 더 깊이 사랑했고, 그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4) 희망을 만든 사람

남수단 아이들은 그를 ‘Father John’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제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한 세대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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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의 정신을 잇는 사람들

이태석 신부의 삶은 영화 <울지마 톤즈>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이태석 재단’을 통해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수단 톤즈에는 그의 사진이 걸린 병원과 학교가 여전히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따라 의사가 되었고, 신부가 되었으며,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심은 씨앗은 여전히 자라고 있습니다.

 

7. 마무리하며

이태석 신부는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의 인생 방향 속에서, 그리고 누군가의 꿈 속에서.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의 이 마지막 말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나요?"

그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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